도서관에 오는 아이들
이 종 화
오늘은 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엄마 아빠 손을 잡은 꼬맹이들의 발걸음이 우리 도서관을 향해 줄을 잇는다. 아직 청소가 끝나지 않았지만 어제 퇴근하기 전 청소기로 대충 정리해 놓았기 때문에 서둘러 마무리하고 아이들을 맞았다. 제일 먼저 쪼르르 달려와서 안기며 인사를 하는 민경이는 월 별 ‘다독 왕’으로 뽑힌 꼬마 독서가답게 얼른 서가 쪽으로 향한다. 금세 도서관이 어린이 세상으로 변하며 아이들의 싱그러움으로 가득해진다. 노란색 앞치마를 두른 자원 활동가들은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에 참여할 아이들을 챙기기에 여염이 없다. ‘책동무야 모여라’팀에서는 옷감에 물들이는 방법을 자세하게 설명해 둔 책을 읽어 준다. 그리고 직접 물감 들이는 체험을 익히게 하기 위해 쪽을 사다가 즙을 낸다. ‘모여서 놀아요’ 팀은 나만의 책을 만들기 위해 슬라이드를 쏘며 책이 제작되는 과정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어린이 전용으로 만들어진 진해 기적의 도서관은 지난 1년 반 사이에 인근 도시의 시민들로부터 부러움을 받을 만큼 명소(名所)로 자리 잡았다. 처음에는 방송 매체에 소개된 내용을 보고 순전히 호기심으로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구경을 하러 오는 관광객이 더 많았던 것이다. 건평 250여 평의 건물에 하루 수백 명씩 몰려들자 자연 시장 바닥처럼 시끌벅적했다. 뿐만 아니라 그 분위기에 휩쓸린 아이들 역시 책을 읽기 보다는 쫓아다니며 신기한 것들 만져보고 깔깔대기에 더 바쁜 듯 했다.
이를 본 이용자들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까지의 도서관은 대출 반납 중심 그리고 공부방으로서의 역할을 해온 게 사실이었다. 이제 어린이 도서관의 새로운 모델로서 이미지를 바꾼 우리의 패러다임을 그 이용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게 어린이 놀이터지 어디 도서관이냐, 그 비싼 땅에 애들을 위한 시설을 세워서 도서관 기능도 제대로 못하게 하여 국민 혈세를 낭비하느냐 는 등의 비난이 쏟아졌다.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독서 문화에 얼마나 무관심한가를 반성하게 했다. 물론 우리는 가을만 되면 우리 국민이 세계에서 책을 가장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의 독서 습관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거듭 강조한다. 그러면서 ‘어릴 적부터 책 읽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를 구호처럼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들만의 독서 공간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인색한 게 사실이다.
어릴 때 책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계기가 떠오른다. 역사 선생님이었던 아버지는 밥상머리에서 옛날이야기를 잘 들려 주셨다. 초등학교 때 우연히 아버지 서재에서 두꺼운 책을 뒤적이다가 유비와 항우라는 이름을 보게 되었다. 아버지로부터 듣던 그 깨가 쏟아지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삼국지’라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야기해 주시는 내용을 나도 알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뜻도 모르면서 이것저것 읽어댔다. 한 번은 밥을 먹는데 중학생인 오빠가 돌을 연달아 씹자 곁에 있던 밥하는 아주머니가 민망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오빠는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듯이 ‘돌보다 밥이 더 많은데요 뭘’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큰 소리로 ‘오빠, 고금소총 읽었지?’ 했다. 순간 오빠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무섭게 눈을 부라리더니 저만치서 신문을 들고 계시는 아버지를 힐끗 쳐다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갔지만 순간적으로 스친 그 때의 불안하면서 민망스럽고 동시에 조금은 자랑스럽던 복잡한 감정은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았다. 그 후로도 나는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것이 반드시 내 삶을 빛나게 바꾸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것이 최악이다.’는 절박한 상황에서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힘이 된 것이 사실이다.
나는 아이들이 도서관을 내 집처럼 생각하고 책을 즐겨 읽는 습관을 갖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독서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려야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책에 흥미를 느낄 사이도 없이 그 책을 읽음으로써 무언가를 얻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감과 그것을 학교 성적과 연관시켜 왔기 때문에 독서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이들이 독서에 질리게 된 것일 게다.
개관(開館) 초부터 자원 활동가들과 함께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도서관에 오면 반드시 조용하게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 합주단과 인형극단 그리고 프로그램 팀을 구성하고 독후 활동을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에 힘썼다. 물론 모든 과정에 어린이 스스로가 참여하고 만들어 갈 수 있게 방향을 정했다. 이외로 호응도가 높아 어른 아이 모두가 좋아하는 행사가 되었다. 이제는 소외 지역 어린이 시설을 찾아가서 공연을 하며 독서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에 도서관은 자연스럽게 책 읽는 분위기로 안정되어 간다. 이제는 5천 여 어린이 회원 가운데 대부분이 이틀에 한 번 정도는 도서관에 와서 조용히 자리 잡고 앉아 책을 읽는다. 그리고 1주일에 3~6권 이상씩 빌려 간다.
오늘이 이 달의 마지막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아빠 엄마 손을 잡은 아이들로 열람실이 가득하다. 앉을 틈을 찾다가 탁자 밑에 들어가 책을 펼치는 녀석을 데리고 강당으로 갔다. 이곳도 만원이다. 어른 손바닥보다 작은 ‘나만의 책 만들기’가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작은 책 만들기에 정신이 쏠려 있는 꼬맹이들의 손놀림이 무척 앙증맞다. 그 틈바구니에서도 책 읽기에 몰입한 아이가 있다.
어떤 어린이가 사랑스럽지 않을까마는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의 인상은 유난히 더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 반짝이는 두 눈, 샛별 같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는 황홀해져서 멍하니 서 있을 때가 많다. 이 아이들이 만들어 갈 따뜻하고 인정스러운 사회를 상상하면서.